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또는 “믿음은 하나님의 축복이자 선물입니다.”이 말들은 우리의 자존심에 호소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버트란드 러셀이 정확히 지적한 바 있다.
위대한
절대자가 당신에게 각별한 관심을 표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당신의 자존심을 지켜줄 것이다.
믿음이 신으로부터의 선물이라는 개념은 예정설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 되는 것으로서,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앞서의 경우보다 훨씬 더한 우월감을 심어 준다.
이 방식 또한 복음서의 예수가 매우 선호하는 방식이다.
산상수훈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 경우라고 하겠는데, 사회의 약자들이 내세에서 큰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선언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그들의 자존심을 북돋아 주는 말임에 분명하다
히틀러와 나찌 또한 이와 같은 방법을 써서 크게 성공한 사례가 있다.
아리안족이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우월한 민족이라는 말은 패전과 경제파탄으로 인해 열등감에 사로잡힌 독일인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적어도 그들에게만큼은 진리로 여겨졌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와 같은 말들도 마찬가지로 자존심에 호소하는 것으로서, 설사 이 말이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고 할 지라도 진실과는 무관한 말이다.
기독교를 이성으로 뒷받침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으며, 그 결과 교회에서는 여전히 위와 같이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방법이 판을 치고 있다.
위에 열거된 방법들을 굳이 나쁘다고 할 이유가 있냐고 궁금해 할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서 믿음을 얻어내는 방법은 사기꾼들에게나 쓸모가 있을 뿐이다.
기독교와 사기꾼은 이런 면에서 상당히 비슷하다.
둘 다 믿음을 먹고 살고 그 믿음을 얻어내는 방법도 정당하지 못하다는 점도 그러하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사기꾼은 자신의 직업이 잘못인 줄 알지만, 기독교인의 동기는 순수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동기의 순수성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며 종교적 독단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다른 분야의 독단도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면에서 비판의 의의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