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비이성적으로 보일 지라도, 기도를 열심히 하고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 의미를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일단 이것 저것 의심을 품지 말고 믿어보면, 나머지 문제는 신께서 알아서 처리해주실 것이다.”
“하찮은 인간의 이성으로 어떻게 신의 위대하고 심오한 뜻을 알 수가 있는가? 의구심을 버리고 믿음을 가지라.”
”이해하고 믿으려고 하지 말아라. 믿으면 저절로 이해된다.”
어떤 교회에서든지, 위와 같은 것들을 은연중에라도 가르치지 않는 곳은 없다고 할 것이다.
일단 저러한 가르침이 성공한 뒤에는, 올바른 믿음으로 포장되는 비이성적인 것들이 얼마든지 주입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정당화는 좁게는 교회의 존립, 넓게는 기독교의 존속을 위해서 필요하겠지만, 불합리한 관념이나 제도의 개선을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잘못된 점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고 해도 그것은 하찮은 인간의 이성에 의한 판단이라는 명분으로 쉽게 묵살될 것이다.
많은 비판자들은 “믿음이 약하다”는 소리를 듣거나 외면을 당하기 십상이다.
이성적 판단의 여과를 거치지 않은 많은 독단적 확신들이 “독실하다”는 칭찬을 받을 만한 태도로 여기는 기독교의 현실 속에서 그러한 결과는 당연하다.
비판문화가 자리잡지 못하는 곳에 부패와 부정이 생기기 쉬운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이성을 불신하는 이유로서 신에 대한 겸손을 말한다.
그렇지만 이성에 대한 불신은 실질적으로 기독교의 존립을 위해 훨씬 더 많이 작용한다.
독단적 신앙이 지배하던 서양의 중세에는 신앙과 이성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오캄의 사상이, 과학이 종교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원인을 제공해 주었다.
종교와 과학은 각각 신앙과 이성의 고유 영역으로서, 그 중 어느 하나가 다른 영역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세력이 커지면서 이성이 다시금 중요해지자, 기독교는 점차 존립에 위협을 느끼고 이 관념을 방어적으로 사용한다.
기독교의 공격으로부터 과학을 보호해 주고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그 사상이 오늘날에 와서는 기독교의 방패 노릇 밖에 못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컬하다고 하겠다.
아무튼 이 관념은 지금에 와서도 막강한 영향력이 있지만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다.
이제는 독단과 맹신을 위한 핑계거리 이상의 쓸모는 없기 때문이다.